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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패스트볼이라 불리는 구종을 한국에서는 오랬동안 직구라고 불러왔습니다.  한국에 야구를 처음 가져온 것은 미국인이었지만 발전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은 일본이었기 때문에 그리 되었을테죠.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야구 역시 정체가 불분명한 일본식 영어 표현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의 작명센스는 좀 기괴한 구석이 있는게, 한자 기반의 말들은 그들이 잘 다룰 수 있는 것이라 그런지 선호를 떠나 말이 되는 범위에 있는데 영어 기반의 말들은 애당초 "말이 안되는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문법적으로 비어인 것도 모자라 의미 자체가 아예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데드볼, 포볼, 러닝홈런, 버스터 같은 것들인데 이런 부류들은 최근 10년 사이 많이 정리된 편입니다.   


가꾸로 꽤 그럴듯한 작명센스가 돋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유격수가 그렇습니다.  영어의 숏스탑(short-stop)이란 말은 미국에서도 정확한 기원이 불분명한 모양인데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서 만든  유격수란 표현이 숏스탑이란 용어보다 더 적절해보이기도 합니다.   좌익, 우익, 중견 같은 표현도 꽤 문학적입니다.  한국의 야구가 발전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멋진 표현들도 있습니다.  바가지 안타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좀 어려운 것은 --- 맞다고 하기도 그렇고 틀렸다 하기도 좀 애매한 부류입니다.  대표적으로 ‘직구’가 그렇습니다.  영어로 패스트볼이라 불리는 이 구종은 오랬동안 직구라 불렸고 일본에서는 직구가 다시 스트레이트로 변해서 “위력적인 스트레이트를 뿌린다”는 식의 표현들도 종종 듣습니다. 


"직구"는 잘못된 말인가?


최근 몇해 사이에 야구팬들이나 야구관계자 사이에서  “직구”가 아니라 “속구”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야구는 미국에서 왔으니 그네들이 쓰는 표현을 쓰는 것이 옳다는 감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다소 사대주의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면 한가지 논리가 더 있습니다.  “세상에 똑바로(직) 날아가는 공은 없다” 입니다.  


해서, 좀 급진적인 커뮤니티에서라면 "그 공을" 직구라고 부르는 것이 마치 와인을 양주라고 부르거나 컨버터블을 오픈카라고 부르는 것처럼 좀 촌스러운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위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점점 중요하게 여겨지다보니 그걸 “직구의 변화”라고 옮겨놓으면 좀 어색하긴 합니다.  직구라고 부르던 공이 이리저리 휘고 구부러질수록 그걸 부르는 말도 혼란스러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패스트볼이란 말도 어색한 맥락이 있습니다.  유희관의 130킬러짜리 패스트볼은 윤석민의 140킬러짜리 슬라이더보다 느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대응 논리는 있습니다. “한 투수가 던지는 구종의 상대적 속도차이”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또 말이 됩니다.  


그런 저런 맥락 속에서 “직구”보다는 “속구” 또는 “패스트볼” 쪽이 대세를 잡아가는 것 같은데, 저는 아직 좀 주저되는 면이 있습니다.  우선은 패스트볼 또는 직구의 반대편에 있는 브레이킹볼 또는 변화구라는 맞짝 때문입니다. 


패스트볼-브레이킹볼의 조합은 시간의 차원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직구-변화구의 조합은 공간의 차원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브레이킹(breaking)이란 말에 “멈춤”이라는 뜻 뿐 아니라 “꺽임”라는 뜻도 있긴 하지만 그조차 자동차가 방향을 바꾸기위해 속도를 줄이는 것 같은 상황을 확장한 맥락이기 때문에 공간보다 시간 쪽에 치우친 말이라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스플리터는 어느 쪽에 속할까요?  당연히 패스트볼 쪽에 속합니다.  말 자체가 이미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이니까요. 포크볼 역시 스플리터의 일본식 표현인 셈이라면 패스트볼이어야 맞을 겁니다.  반면 직구-변화구 진영에서는 스플리터가 변화구에 속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직구-변화구 진영의 강점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느낍니다. 


"속구"라는 말은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패스트볼=직구, 브레이킹볼=변화구 로 대응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다른 두 진영은 투구의 구종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구분하는 접근방식입니다.  마치 영어에서는 수박과 참외가 같은 멜론 집안이지만 한국어에서는 호박과 수박이 같은 박 패밀리인 것과 비슷합니다.  


어느 쪽 조합이든, 한편은 속도를 무기로, 다른 편은 변화를 무기로 하는 구종을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겠지만 피칭기술의 발전에 따라 속도를 무기로 하던 구종이 변화를 추구하게 되고 변화를 무기로 하던 구종이 숙도를 추구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혼란일 것입니다.  20년이나 30년쯤 전이라면 패스트볼-브레이킹볼의 진영과 직구-변화구의 진영이 사이좋게 공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텐데요. 


결국 관건은 소위 moving fastball 입니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스플릿핑커패스트볼, 컷패스트볼, 투심패스트볼, 포심패스트볼이 있습니다.  (싱킹패스트볼 같은 것은 약간 다른 차원의 정의입니다.  앞의 넷은 던지는 법을 기준으로 하는데 싱킹 패스트볼 같은 것은 움직임에 대한 것입니다.  대체로 투심패스트볼이 싱킹 패스트볼의 움직임을 가집니다.)


제가 “직구”라는 표현이 가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속구”라는 대체표현에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은 그래봐야 별로 나은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문제는 패스트볼이 다 똑같은 패스트볼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패스트볼=속구 라고 말할 수야 있겠지만, 각각의 서로 다른 4종류의 패스트볼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요? 두실밥 속구?  비껴잡은속구?  벌린 속구?  결국 기껏 바꿔놓은 "속구"란 말을 버리고 "패스트볼"이란 말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럴바에야 한국어 표현을 포기하고 그냥 "패스트볼"이라 하는 것에 비해 잇점이 없습니다.   


결국 “속구”라는 표현은 구분되지 않은 “패스트볼 일반”을 부를 수 있을 뿐, 애당초 의도했던 --- 진화된 새로운 피칭을 표현하지 못하는 말이 되지 못하며, 그저 원래의 미국식 표현에 가깝다는 것 말고 다른 의미는 찾기 어렵습니다.  직구란 표현이 모자라다 해도 어쨌든 변화구라는 짝과 함께 완성된 말인데, 속구라는 말은 제대로 된 활용형을 가지지 못하는 한에, 미완성의 말입니다.  


물론 완벽하게 곧바로 날아가는 공은 없다


물론 그래도 남는 것은 하나 있죠.  “세상에 똑바로 날아가는 공은 없다”

즉, “속구”라는 말이 영어표현에 대한 직접적인 번역이란 것 말고 다른 장점이 없다해도 “직구”가 가진 결함은 적어도 피할 수 있다는 주장일 것입니다.    


하지만 “직구”도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기하학적으로 직선의 정의는 “곧은 선”이 아니라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를 말합니다.   패스트볼 처럼 직접적으로 속도를 겨냥하는 말은 아니지만, “공간적인 최단거리”는 오히려 더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투수의 손끝에서 포수의 미트까지 궤적을 품는 정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평면에서 두 점을 잇는 직선은 오직 하나 밖에 없지만 곡면에서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는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남극에서 북극으로 가는 무한히 많은 경로처럼)  그런데 투수의 손 끝과 포수 미트 사이는 마그누스와 뉴튼의 법칙이 지배하며 중력과 기압, 마찰력이 작용하는 역동적인 물리공간입니다. 따라서 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가장 짧은 경로란 아주 다양하고 입체적인 궤적을 뜻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이 직선운동을 한다고 할 때, 그 경로는 우리 눈으로 보는 곧은 선이 아니라 매질의 경계를 통과할 때마다 (또는 중력장의 영향을 받아서) 꺽이고 휘어지며 만들어내는 최효율의 궤적을 말합니다. 


게다가 투수와 홈플레이트 사이의 “최단거리”란 타자의 판단과 반응속도를 가로질러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할 가능성이 극대화할 수 있는 피칭의 전략적 최적 루트를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직선은 가장 효율적인 궤적을 말한다


즉 직선의 정의가 “곧은 선”이 아니라 “두 위치 사이의 최단 경로 또는 가장 효율적인 경로”라고 할 때 “세상에 똑바로 날아가는 공은 없다”는 공리는 “직구”란 표현의 정당성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직구”가 여전히 살아남는다면, “변화구”는 자신과 더 어울리는 파트너와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그래왔듯 좋은 세월을 좀 더 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속구"라는 말도 절대적인 기준에서의 빠른 공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좀더 빠른 공과 그렇지 않은 공을 구분하는 것이라면, 상대적으로 좀더 "직"한 공을 "직구"라고 부르는 것이 용인되지 못할 이유도 별로 없지 않을까요? 


“직구”라는 표현이 “속구”라는 표현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속구”라는 대체재를 통해서 --- 포심, 투심, 스플릿핑거, 커터 같은 다양한 종류의 패스트볼을 구분하고 표현할 수 있을게 아니라면 애써  “직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만큼의 타당성을 인정해주긴 어렵다는 생각은 듭니다.   패스트볼 패밀리는 당연히 새로운 야구용어가 품어야 할 중요한 대상이지만 자식들 전부 내버려두고 “속구” 혹자 딸랑 이민오는 거라면, 글쎄요.  굳이 잘 살고 있던 “직구-변화구” 커플을 내몰아야 할 정도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 패스트볼-브레이킹볼 조합에게 빌려오고 싶은 장점이 있다면 공이 곧바로 날아간다 아니다 하는 것보다는, 궤적" 대신 "타이밍"을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많은 경우 타자가 변화구를 불편해 하는 것은 공의 휘어지는 궤적 때문이 아니라 패스트볼보다 느린 그 브레이킹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누군가가 이 부분을 근거로 궤적에 뿌리를 둔 직구-변화구 조합보다 타이밍을 향해 가지를 뻗은 패스트볼-브레이킹볼 조합을 주장한다면 그쪽은 좀더 고민해보고 싶긴 합니다.


*** 직선의 정의가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 라는 아이디어는 어떤 블로그에서 우연히 본 것입니다.  포스트에 함께 적고 싶어 다시 찾았는데 그게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네요.  




댓글
  • 프로필사진 삼팬 속구라는 표현은 '계열'아닌가요? https://ko.wikipedia.org/wiki/%EC%86%8D%EA%B5%AC 2015.09.08 22:27 신고
  • 프로필사진 토아일당 '계열'이라 하신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최근에 직구 대신 속구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꽤 있긴 합니다. 2015.09.09 17:49 신고
  • 프로필사진 트윈스우승 직구와 속구의 논쟁에서 속구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씀(특히 직선은 곧은 선이기보다 최단거리를 뜻한다는 말씀)에 감명을 얻고 갑니다. 자주들르겠습니다! 2015.09.08 23:23 신고
  • 프로필사진 토아일당 직구에 관해서,,, 직선 정의에 대한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저도 다른 어떤 분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것입니다. 포스트에 함께 적고 싶었는데, 어디서 본건지 도통 찾을 수가 없네요. 2015.09.09 17:50 신고
  • 프로필사진 이과장 페이스북에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토아님의 글을 볼 수 있군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여기도 추천 한 번..좋아요도 한 번...^^
    2015.09.10 07:50 신고
  • 프로필사진 썽망 야구팬으로써 재밌게 잘 읽고가요~~!! 2015.09.10 10:09 신고
  • 프로필사진 야구고물상 ㅎㅎ 뭐 재밌는 생각인 것 같긴 합니다만..전 그래도 속구가 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네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직구의 궤적이 최단거리라고 하는 거는 안 받아들여집니다. 빛이나 이런 거 공부할 때 최소 시간이 걸리는 궤적 같은 걸 배우기는 하는데 직구는 '인위적인' 거잖아요. 그걸 최단거리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어차피 직구냐 속구냐는 사람들이 뭘 더 많이 쓰느냐에 따라 갈리겠지만요.
    2015.09.18 23:01 신고
  • 프로필사진 EVER17 글 잘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쓰이는 '직구'나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스트레이트'는 엄밀히 따지면 패스트볼 중에서도 '포심 패스트볼'을 가리키는 것이라 봅니다. 일본에서 투심, 커터 등은 스트레이트와는 별개의 구종으로 취급됩니다. 포심만 스트레이트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포심 외의 패스트볼도 직구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기는 한데 직구라는 명칭이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걸 생각하면 원래는 포심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투심, 커터같은 구종이 생겨나면서 포심과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직구라고 하는 경우도 많아진 것 같습니다.

    직구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저도 어쩔 수 없이 자주 쓰긴 하지만 포심이나 4심이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투심, 싱커, 커터, 스플리터 등도 영어 표현 그대로 쓰면 된다고 보네요.
    2015.09.19 08:59 신고
  • 프로필사진 직구파 저도 미국식 용어이니 속구를 써야한다는 주장엔 뭔가 갸우뚱 했었고 언제 한번 글로 써봐야지 했었는데 대단히 흥미로운 글을 써주셨네요. 이건 한일의 동아시아와 미국이 패스트볼의 서로 다른 특성에 주목해서 언어화한게 아닌가 합니다.

    적어도 한국인의 언어감각엔 직구가 더 와닿는 것 같아요.
    직선에 더 가까운 포물선을 그리는공 vs 직선에서 더 먼 포물선을 그리는 공.
    전자는 직구이고 후자는 변화구죠.

    딱 눈에 보이고 그 특성에 맞게 이름도 붙여집니다.

    근데 속구에서 속도는 정성적 단위라 대단히 어색해요. 00보다 빠른 공 00보다 느린 공. 적어도 한국의 언어감각으론 단순히 ~~보다 빠르고 ~~보다 느리다는걸로 특성을 잡아내서 이름붙이기가 뭔가 특성을 잘 포착해냈다는 느낌이 없지요.

    즉 영어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의 언어감각으론 직선같은 기하학적 특성은 이름을 붙일만큼 개성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속도는 뭔가 모호합니다. 대단히.


    타이밍이란 개념이 패스트볼에 있다고 한다면 그건 속구가 아닌 다른 표현으로 번역돼야 할것 같습니다. 시간차 공이 아닌 공이란 개념이 들어가게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시간차 없는 정직한 공?
    2015.10.01 02:2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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