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야구에 관한 다소 과격한 화두가 던져지고 있는데 예를들면, “로봇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해야 한다”라거나 “구원투수의 세이브기록이 없어져야 한다” 같은 것들입니다. ESPN의 기획물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올 1월25일 MLB 커미셔너 롭 만프레드의 취임 1주년을 맞아 그쪽 시니어 필진들이 돌아가며 칼럼 이랄지 제안이랄지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계판정]과 [세이브기록 없애기] 말고도
- 현재의 MLB 25인 로스터를 28명으로 늘리고, 매 경기 출전선수 25명을 정해서 운영한다.
- 감독과 코치 뿐 아니라 포수 등의 동료선수 포함해서 마운드 방문을 9이닝 당 2번으로 제한해야 한다.
- 덕아웃에 안전망설치
- 마이너리거에 대한 더 많은 보수 지급
같은 것도 있습니다. 이중 일부는 KBO리그에서 이미 하고 있는 것이니 약간 묘한 느낌도 듭니다.
이 시리즈의 부제는 그런데 MLB2.0:Reimagining baseball 입니다. 꽤 도전적인 뉘앙스입니다. 그저 조각난 의견 몇개를 꺼내놓는 것을 넘어, “야구를 바꾸자”는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야구를 바꾸자
덕아웃에 안전망을 치자는 것도 생각 이상으로 급진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야구문화에서 관중과 선수 사이에 “안전 따위의 소소한 이유” 때문에 그물을 친다는 저 천박한 발상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타락일 수도 있습니다.
코칭스탭이나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엉덩이를 툭 쳐주는 관습도 불필요하다며 없앤다면 도대체 야구의 낭만이란건 남아날 수 있을까요?
해서 ESPN의 필진들이 던지고 있는 화두들은 오랜 시간동안 야구의 암묵적 본질이며 그래서 일종의 신성불가침한 것이라 믿어온 것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세이브라는 기록을 없애고 릴리프 포인트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 역시 단순한 기록과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야구에 관한 전통적 관념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세이브]란 승리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는 [클로저]와 그에 앞서 등판하는 그냥 흔한 [구원투수] 사이를 구분해온 가장 결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전통은 다른 것들보다 휠씬 역사가 짦긴 합니다)
언어는 관념을 지배합니다. 클로저에게만 부여되는 별도의 기록, 즉 세이브라는 언어가 사라지면 클로저라는 관념도 흐릿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강한 팔을 가졌다면 좋은 투수가 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강한 심장을 가진 투수만 좋은 클로저가 될 수 있다든가 하는 근질거리는 클리셰 따위도 퇴색되겠지요. (하지만 전 이런 근질거리는 클리셰를 완전 사랑합니다)
그런데 제게 더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던지고 있는 논제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입장의 스펙트럼보다 기자 따위(?)가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 자체였습니다. 도대체 한낱 기자들이 ‘신성하기 그지없는 야구 자체의 본질에 관해’ 감히 논하는게 가당한 일일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언어는 관념을 지배한다
야구기자 역시 야구와 관련된 사람들이며 그들 역시 야구에 관해 말하고 발언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은 야구인은 아니고 따라서 주변이 아닌 야구 그 자체, 야구의 본질에 관해서는 발언을 위한 완전한 지분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는게 아닐까요? 옳은지 그른지 몰라도 저에겐 그게 좀더 자연스러운 관념이긴 했습니다.
(물론 요 며칠 한국야구기자들이 [기계판정]과 [세이브기록]에 대한 글을 썼지만, 기자 스스로의 주관을 빌어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미쿡의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권위를 빌지 않고서? 아마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자들에게는 그런 주제를 스스로의 주관과 판단에 근거해 다룰 자격이 주어져 있지 않을겁니다. 그들은 야구인도 아니니까요)
---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야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 있는데 헨리 채드윅입니다.
박스스코어의 개념을 포함해서 아직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야구의 기록법 상당부분은 그가 고안해낸 것입니다. 경기에 대해 팀과 선수의 삼진, 안타, 홈런, 루타수를 기록하는 방식이 그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타율, 장타율 같은 지표 역시 결국 그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스코어링시스템 뿐 아니라 야구규칙에도 그의 유산이 큽니다. 초창기 야구에서는 지금과 달리 야수가 타구를 원바운드 캐치할 경우 아웃이었다고 합니다. 그걸 지금과 같은 규칙을 바꾸어 놓은 것도 헨리 채드윅이었습니다.
기록과 규칙 뿐 아니라 야구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전쟁 초기였던 1861년 브룩클린과 뉴욕 사이의 특별경기를 성사시키기도 했고 반-도박 캠페인을 가장 열정적으로 이끌며 야구가 현재의 미국 국민스포츠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그런데, 핸리 채드윅은 한낱 [기자]였습니다. 즉 야구의 기록법이나 룰의 결정적인 부분을 [기자]가 만들어낸 것이죠.
기자는 야구나라의 시민권자일까?
[세이브]라는 기록을 만들어낸 것도 그리고 보면 [기자]입니다.
야구기자였던 제롬 홀츠먼은 당시 일부 구단에서 내부 평가용으로 사용되곤 하던 [세이브]라는 개념을 새로 정의해서 스포팅 뉴스(The Sporing News) 지면에 집계하기 시작했고 몇년 후 1969년 MLB 공식기록으로 채택되게 됩니다. 이는 1920년 타점(RBI)이 공식기록으로 추가된 후 약 5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세이브]란 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그걸 다시 없애자고 말하는 것이 그래서 하등 이상할 일이 아닌 듯도 싶어집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언어는 관념을 지배합니다.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15시즌 최준석은 김태균보다 26개 더 많은 안타를 쳤지만, 팬들 대부분은 김태균이 최준석보다 더 좋은 타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타율이라는 언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해 사이 OPS라는 언어가 지배력을 가지게 되면서 이전이라면 높게 평가받지 못했을 나바로 같은 타자에 대한 평가로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승리투수]라는 언어가 사라지면 [선발투수]에 관한 관념도 달라지게 될까요? 적어도 5회 2사에 치명적 위기를 맡은 투수에 대한 교체시기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모르죠. [세이브]라는 언어가 사라진다면 불펜 에이스가 경기의 마지막이 아니라 7회나 8회의 위기상황에서 등판한다고 해서 [자존심]이니 [희생]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죠.
[세이브]라는 기록이 유효한가 아닌가,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만약 세이브라는 기록이 사라진다면 야구는 어떻게 달라질까. 그 변화는 더 좋은 것일까”라는 논점이 아닐까요.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 vs 누가 바꾸어야 한다
덧붙여, [기자]는 [야구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이들일까요 아닐까요? 문화에 따라 전통에 따라 다르겠지만, 야구의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어쨌든 야구의 역사와 야구의 미래에 의미있는 지분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물며 언어 뿐 아니라 규칙 조차 만들어온 미국의 풍토에서는 더 그렇겠죠. 물론 한국의 야구저널리즘에게 같은 기준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MLB2.0: Reimagining baseball 이라는 ESPN의 도전적인 기획을 보며 “야구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라는 뿐 아니라 “누가 야구를 바꾸어야 하는가”라는 것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 박스스코어의 창시자 - 최초의 룰북 저자 - 최초의 전국 야구협회 규칙위원장 그리고 [야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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