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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를 떠난 이상훈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by 토아일당 2015. 1. 27.

 topic   이상훈 야생마 엘지트윈스 한국시리즈 삼성 이승엽 마해영 김용수 프랜차이즈 주니치 은퇴 선발 20승


2002년 11월 10일  6차전 9회말.

늘 강한 전력을 가졌으면서도 단 한번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지 못했던 팀 삼성.  

시즌 초의 모든 예상을 뒤엎고 김성근 감독의 지도와 베테랑들의 거짓말 같은 투혼으로 플레이오프를 뚫고 시리즈 6차전까지 버티고 있는 엘지 트윈스.

대타 김재현의 거짓말같은 적시타로 트윈스는 삼성에 9:6로 리드하며 마지막 이닝을 맞았다.   베이스에 2명의 주자를 두고 마운드에는 주니치와 보스턴을 거쳐 돌아온 이상훈.  타석에는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이승엽이 서 있었다.  그 다음 장면은... 

아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2004년 5월18일 두산전.  연장 10회초 1점을 내서 역전에 성공한 SK는 당시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긴 10회말 이상훈을 마운드에 올렸고 그가 경기를 마무리했다.   한국리그에서 98번째, 일본리그를 포함한 커리어 전체로는 101번째 그리고 그의 야구 커리어에서 마지막 세이브였다.  

어떤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특히 조범현 감독은 기죽은 이상훈에게 더블 마무리로 기용되고 있는 조웅천의 눈치까지 보면서 세이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지만 별 효과가 없다. 지난 18일 잠실 두산전에서 5―4로 앞선 연장 10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잘 던지던 조웅천을 빼고 이상훈을 투입한 게 대표적인 경우. 이상훈은 첫 타자 최경환에게 볼넷을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후속타자 김창희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 겨우 ‘만들어준’ 세이브를 챙겼다 


그리고 2004년 5월 23일 삼성과의 경기 9회에 등판했다.   SK는 5점을 뒤지고 있었다.  이상훈이 패전처리로 마운드에 오른 것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등판이다.   

며칠 후 2군행을 통보받은 이상훈으로 그리고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한다.  더이상 공을 던질 수 없다면서.

부진에도 불구하고 팀은 그에 대한 미련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훈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연봉 6억원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었을텐데.  그가 마지막에 입고 있던 유니폼에는 줄무늬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상훈의 마지막은 2004년 5월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그의 갑작스런 은퇴선언을 사람들은 이상훈 답다고 말한다.  그런데 SK의 유니폼을 입고 패전처리로 마운드에 오른 이상훈은 이상훈 다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은 2003년도 트윈스의 마운드에서 마지막 공을 던졌던 순간, 아니 그것도 아니고 2002년 한국시리즈 9회말의 마운드에 서있던 바로 그 순간이다.   


만신창이 팀을 이끌어 플레이오프를 뚫고넘어 당대 최강팀 삼성의 혼을 빼놓았던 2002년 트윈스 마무리 투수 이상훈일때.  "던질 수 있으냐고 묻지 마시고 던지라고 하십시요.  저는 언제나 준비되어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이승엽에게 동점홈런을 맞고 그에게 공을 넘겨받은 최원호가 마해영에게 바로 그 역전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으며 눈물겨운 트윈스의 사투가 그저 준우승으로 그쳤지만, 그래도 그게 이상훈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믿으며, 트윈스를 위해 싸우는 남자. 

와이번즈의 유니폼을 입고 열정도 투지도 잃은채 직업으로서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이미 이상훈이 아니니까.  이상훈 스스로도 그러기를 거부했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2009년 WBC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대표팀 클로저 임창용이 이치로에게 제대로 안타를 얻어맞으며 경기를 내주자 그는 한순간에 역적이 되었다.  결승에 오르기까지 수도 없던 수퍼 세이브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그 마지막 순간 하나만으로 되지 않는 비아냥과 모멸이 들씌워졌다.  이 동네는 그런 동네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이상훈의 마지막 그 허망한 "피탄"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상훈이었으니까.  

이상훈이 맞았으면 세상 천지 누구라도 맞을 수 밖에 없는 거라는 믿음, 확신, 사랑이 있었으니까.   

이상훈이 맞았다면 선동열 최동원 아니라 산타나, 랜디존슨이라도 맞을 수 밖에 없었던거라는 이 말도 안되는 생각이 도대체 진실이라 느껴지는거다.  이상훈은 우리에게 그런 투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야구의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하나이며 좌완의 절대 카리스마였다. 

고려대 시절인 1992년, 성대와의 경기에서 선발 조성민에 이어 4회에 구원등판했고 그가 이후로 10여년에 걸쳐 써내려갈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종전 11타자 연속탈삼진기록을 14개까지 늘려놓은 것을 오히려 무색케 하는 것이, 그가 그 경기에서 잡아낸 17개의 삼진.  그는 4회에 구원등판했으니, 9회까지의 아웃카운트는 18개.  그중 17개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는 이야기다.



93년 프로데뷰한 그는 2년차였던 94년 18승을 따내며 팀을 챔피언으로 만들었고, 스스로도 최다승 투수가 되었다.

95년 2.01의 평균자책점으로 선발 20승(5패)을 따내며, 프로야구 역사상 8번째 20승 투수가 되었다. (이전의 20승 투수는 박철순, 장명부, 최동원, 김일융, 김시진, 선동열, 이상윤.  그후 김현욱, 정민태와 다니엘 리오스가 추가됨)  20승 전부를 선발로 따낸 것은 그가 최초였고, 일본출신의 85년 김일융을 제외하면 KBO역사상 유일한 좌완 20승 투수이다. 


96년 척추분리증과 손가락 혈행장애로 공을 많이 던질 수 없게된 이상훈은 마무리로 전환해서 이듬해 47세이브포인트로 그해의 최우수 클로저가 되었으며,

98년 NPB의 주니치로 이적해 선동열과 함께 불펜의 원투펀치가 되어 팀의 리그챔피언으로 만들었고, 다음해 MLB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 트리플A 45경기 평균자책 2.03 메이저리그 9경기 평균자책 3.09의 꽤 주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며 한국, 일본, 미국 3개국의 마운드에 섰던 최초의 선수가 된다.

 

물론 일본, 미국에서의 경력이그렇게 굉장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95년 한일수퍼게임이 열린 도쿄돔에서 1차전 6이닝2사까지 4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을 일본타선을 묶어 경기MVP에 올랐으며 당시 타선에 있던 스즈키 이치로 역시 3타수 무안타로 제압했던 걸 보면, 그의 일본, 미국에서의 다소 아쉬운 성적이 경기 외적인 요소들 때문이었다고 말하는게 그저 팔이 안으로 굽어서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도전한게 어디냐고 애써 추킬 이유도 없지만, 반대로 그것이 이상훈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더구나 아니다. 

 

*** 이상훈이 주니치 시절에 전문 불펜투수였던 것은 아니다.  적응을 마치고 제대로 뛴 시즌 1999년에 11경기에 선발등판했고 2번의 완투 기록도 있다.  괜찮은 선발투수였다.  후반기에 불펜으로 뛰며 주니치의 우승 주역 중 하나가 되었고 ERA 2.83를 남긴다.   불펜에서의 활약은 2012년 유원상을 연상하면 된다.  클로저 앞에 등판해서 경기를 정리해주는 파괴력있는 프라이머리 셋업. 

  

언뜻 제멋대로의 이단아처럼 보이는 그는, 그러면서도,

지독한 승부사 김성근감독이 첫손에 꼽는 마음속의 제자이며,  96년 이광환감독이 구단의 압력으로 옷을 벗게되자 시즌이 끝나자마자 전국을 돌며 동료들을 묶어 선수협을 만들겠다고 떨쳐나선 열혈남아였고 그라운드에서 쓰러져 여전히 병실에 누워있는 선배 임수혁에게 오랬동안 병원비를 보탠 의리있는 동료였다고 한다. 


기록과 성적으로 보면 이상훈은 최고의 투수가 아닐 수도 있다.  최고 중의 하나이기는 해도 그보다 더 오래, 그보다 더 많은 그리고 그보다 더 인상적인 기록과 성적을 쌓은 투수들이 있다.

한번 청소년 대표에 뽑힌 적이 있긴 하지만, 고교시절의 이상훈은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대학시절 조차 4학년 이전에 큰 임팩트를 보인 적이 없다.  트윈스에서 뛴 것도 기껏 7시즌. 

 

트윈스가 가졌던 가장 위대한 투수는 김용수이다.  하지만 트윈스 팬들이 가장 사랑한 투수는 이상훈이 아니었을까.


마운드에서 불처럼 뜨거웠고 그 마운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바칠것 같았던 투수 이상훈, 남자 이상훈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순간만 잠시 최동원은 잊기로 한다.  나는 트윈스 팬이니까) 

그게 우리가 그를 아프게 추억하며 아마도 오래오래 그리워하게 되는 이유일것이다.  

 

그에게도 어록이 있다.  SK라고 쓰고 LG라고 있는다... 그것참.  

아래는 그가 했던 몇가지 인터뷰 중 일부이다.  선발투수는 한팀에 5명이지만, 마무리는 오직 한명이라는 그의 말도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미국진출을 위해 일본진출에 동의했다는 건가.

주니치에 진출하며 LG와 이면계약을 했다. 주니치 임대기간 2년이 끝나면 날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주기로 했다. 대신 한국 복귀 시는 무조건 LG로 돌아오기로 했다. 


무조건 LG로 돌아온다라.

난 LG 구단의 녹과 LG 팬들의 사랑을 먹고 큰 선수다. LG가 내 영원한 팀이다. 내가 어딜 갈 수 있겠나. 가슴에 그 어떤 영어 이니셜이 찍혀있든 난 그걸 ‘LG’로 발음했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몇 년 후 LG에서 쫓겨나 다른 팀으로 갔을 때 가슴에 찍힌 영어 이니셜은 같은 두 글자였지만 난 그걸 ‘LG’로 읽었다.


당시 잠실 같았으면 홈런은 고사하고 평범한 외야플라이로 끝났을 것이라는 LG 팬들의 아쉬움이 많았다. 지금이야 광주구장 펜스가 넓어졌지만, 당시는 작긴 작았다.

(단호한 음성으로) 그렇지 않다. 내가 못 던지고 (이)종범이가 잘 친 거다. 농부가 연장을 탓하지 않듯 투수도 펜스를 탓해선 안 된다. 구장이 작으면 작은 대로 넓으면 넓은 데로 잘 던지면 된다. 


요즘의 젊은 투수들은 마무리보다는 선발을 선호하는 것과 달리 당신은 마무리 가 더 의미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무리 투수의 참맛은 무엇인가.

마무리 투수는 누군가의 승을 챙겨준다. 그와 함께 자기도 세이브를 챙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선발은 어느 팀이나 5명이다. 그러나 마무리는 팀마다 한 명이다. 선발은 5명이 순서대로 던지지만, 마무리는 팀이 이기면 매일같이 마운드에 올라야 한다. 


붙임 - 

공을 던질 마음이 안든다고, 시즌 도중에 스스로 제멋대로 유니폼을 벗어버린 것은 프로답지 못한 행동이며 미화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죠.  이상훈은 프로답지 못한 선수였습니다.  그는 그냥 이상훈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더 그리운거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