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topic   세이버메트릭스 빌제임스 야구통계 야구에대한객관적지식 클러치히터 스탯 


야구의 스탯과 마법의 수정구슬   


스탯을 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근차근 경기를 직접 보는 것과 별로 다를게 없는 일입니다.  경기에 없던 것이 스탯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 유독 비밀스러우면서도 또한 과학적인 무언가가 스탯 안에 있다는 것은 허상입니다.  그저 차이가 있다면 물리적으로 모든 경기를 다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직접 본 경기라도 그전부 기억할 수 없다는 것 정도입니다.    


중요한 또 한가지는, 기억은 그리 많은 것을 담지 못하며 종종 우리는 속인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선수들의 스탯을 보면 우리가 알고 또 믿어왔던 것과 비슷합니다.    


154km짜리 강속구를 가진 OOO의 9이닝당 탈삼진 숫자는 실제로 높고, 유난히 자주 모자를 고쳐쓰는 OOO의 스탯에서는 정말 BB/9 가 높은 걸로 나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가끔 멈칫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니, 이 녀석의 K/9 이 이렇게나 높아?  늘 볼질하다가 쳐 맞는것만 봤는데?"   


이 순간 두가지의 극단적인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이렇게 나아갑니다.


"뭐야 늘 중요한 순간에는 땀만 삐질삐질 흘리며 경기를 말아먹더니 아무 쓸데 없는 상황에는 제대로 던졌나보네.  이놈 스탯관리 쩌는구만." 


이렇게 꼬리표를 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쭈욱 그 선수에 대한 편견으로 작동합니다.  


기억은 늘 우리를 속인다. 야구팬을 특히 더 잘 속는다. 


7대3으로 리드한 6회초, 1사의 주자 한명을 출루시키고 OOO가 등판합니다.   첫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그 다음타자에게 볼넷 허용.  2사 1,2루 상황에서 그 다음타자는 내야땅볼로 아웃시킵니다.  다음 이닝에도 나와서 2명의 타자를 삼진과 플라이아웃으로 잡고 다음타자에게 2루타를 맞고 2사 주자2루 상황에서 다음투수에게 공을 넘겨주고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1과 1/3이닝 동안 피안타(2루타) 1개, 볼넷 1개, 탈삼진 2개를 기록했습니다. 

    

"하여간 저놈 역시 점수차가 좀 나야 투수노릇하네.  끌끌.  근데 저정도 점수차면 칠테면 쳐봐라 하고 그냥 꽂아넣어야지 왠 볼질은.  하여간 똥줄 야구 지겨워죽겠네.  어째 깔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어."   


반면 같은 상황에서 또 다른 투수가 등판해서 똑같은 결과를 남길 경우 반응은 아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음 역시 OOO 는 아주 뛰어나지는 않아도 공헌도가 높은 투수야.  사실 경기후반으로 넘어가는 6회에 자칫 한두점 줬으면 분위기 넘어가서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몰랐는데 잘했네.  홀드 상황도 아니었을텐데 확실히 묵묵히 자기 역할 해주네.  나이스!!"   


그리고 그후로 영원히, 아마도 엄청나게 임팩트있는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지기 않는다면, 아니 설사 그랬다 할지라도 --  동일한 능력, 동일한 퍼포먼스의 두 투수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으로 기억 속에 남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더라도 그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인상, 선입견에 의해 재가공되어 저장됩니다.     


하나는 멘탈쓰레기에 스탯관리에만 정신이 팔린 지독하게 이기적인 나쁜 놈이고, 다른 하나는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가는, 늘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주는 팀 공헌도 준수한 나이스가이로.   만약 그 팀이 10년동안 개나 소나 다 가는 가을야구 한번 못해 본 팀이라면 더 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암흑기의 주범. 팀웍 파괴분자.  암덩어리...  (제가 그랬던  팀을 하나 알고 있지요.)   


4점차 앞선 6회초 1사 주자1루 상황에서 1과 1/3이닝을 저런 게임로그로 공을 던진 투수에 대해 둘 다 아주 틀릴게 없는 평가입니다.  6회초의 4점차는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간격이며, 한명의 주자를 더 허용한 후 등판이닝을 마쳤고 다음이닝에서 아웃카운트 2개를 잡긴 했지만 한번의 출루를 더 허용한 것은, 불안하다면 불안했고 무난하다면 무난했을 결과입니다.  두번의 출루허용과 두개의 탈삼진은 깔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또다른 길


이 투수의 등판을 스탯으로 정리한다면 1과 1/3이닝  WHIP 1.5  피안타율 0.200  피장타율 0.400  피출루율  0.333  피OPS 0.733   BB/9  6.75  K/9 13.5  K/BB 2.00 이 됩니다.  물론 이 숫자들이 플레이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점수차, 어떤 아웃카운트였고 상대 타자가 누구였는지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해석이 필요한 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방향에서 다른 쪽을 고려할 필요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인상으로 기억되던 두 명의 투수가 의외로 같은 스탯을 찍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때까지의 선입견을 일단 리셋해두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다음부터 그 선수의 플레이를 볼 때, 일단은 중립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애초의 기억과 인상이 옳았다는 결론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을겁니다. 


(다만 이런 식의 "리셋능력"이 인간이란 종족에게 장착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노력해볼 수는 있을 겁니다.)


편견은 터무니없는 상황이 아니라, 나름 말이 되고 그럴 법한 상황에서 생겨나고 또 뿌리를 내립니다.  그렇기때문에 [스탯]을 보는 것은, 그것이 신비로운 비밀을 투영하는 "마법의 수정구슬"이어서가 아니라, 결함 투성이 기억의 위태로움과 뻣뻣하기 이를데 없는 편견의 무례함으로부터 건강하고 합리적인 자신의 판단력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통계적 도구를 야구에 활용하는데 누구보다 크게 기여한 빌 제임스는 이런 글을 쓴적이 있습니다.     


내가 (엄격한 데이터가 없는 상태에서) 클러치 히팅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꺼려지는 이유는 야구경기의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선수의 인격테스트로 간주하는 것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자니 베이스볼이 형편없는 클러치 히터라는 글을 쓴다면, 그 글은 자니 베이스볼이 겁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나는 어떤 선수든 간에 확률적으로 벌어진 결과의 데이터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인격을 조롱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웅 만들기 같은 저널리즘의 왜곡, 스포츠가 경기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성공을 위한 강인함과 용기를 깨달으며 깊은 내면으로부터 진심으로 노력하여 성취하는 선수들의 인격테스트라고 믿게끔 강요하는 왜곡들이 있다. 나는 거기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데이터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볼 뿐이며 운동선수들의 인격에 관한 어떠한 판단에도 가까워 질 뜻이 없다. 


어쩌면 스포츠 토크쇼 진행자들은 그것이 편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그들의 직업이지 내 직업이 아니다. 이 논쟁은 오랫동안 혼란스럽게 계속될 것이며, 나의 유일한 목표는 이것을 조금이라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 The Hardball Times Annual 2008, "Mr. Clutch" 중에서   


빌 제임스는 세이버매트릭스가 "야구에 대한 수리적이고 통계적인 접근"이라고 한정짓는 것에 대해서 종종 거부감을 비치며 자신의 목표는 그저 "야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추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그 말뜻을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야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추구    


어쩌면 빌 제임스가 흥미롭지만 고독했을지 모르는(물론 이제는 아니겠지만!) 그 방대한 작업을 했던 동기야말로 , 우리가 지금도 흔히 만나는 -- 팬이라는 이유로 야구 좀 봤다는 근거로 서슴없이 선수들의 인격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자칭 열혈팬들을 보며 느끼는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게 아닐까요?     


하여 "야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추구"란 다른 말로 "빠와 까의 배척"이며, 구라쟁이 TV해설가에게 배운 야구를 가지고 플레이 자체가 아니라 선수들의 인격과 살아가는 태도 자체를 싸잡아 모욕하고 폄훼하는 것이 팬들의 당연하고 합당한 권리이자 의무라 여기는 무리들에 대한 반격의 신념이었던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빌제임스가 언젠가 "나는 세이버매트리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도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안타깝게도 그러나 아마도 당연하게도, 세이버매트릭스의 날카롭게 잘 벼려진 도구들은 종종 더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빠질과 까질을 위해 사용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어설프게 외워 익힌 몇가지 통계적 분석적 지표를 맹신하며 그 잣대로 야구와 야구선수를 줄세우고 재단하여 그에 벗어나는 모든 의견을 묵살하고 공격하는 것이 세이버메트릭스라면 예, 빌제임스는 절대로 세이버매트리션일 수 없겠지요.  


세이버메트릭스의 도구를 이용해서 다른 이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고, 그것을 권위와 위세로 삼아 야구에 대한 소박한 애정과 서툰 애호를 깔아뭉개며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예, 그것은 절대로 야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추구와 상관없는 것일테지요.    


스탯을 보는 것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스스로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스탯도 야구 그 자체를 완전히 담을 수 없으며 100퍼센트 중립적일 수 없으니, 스탯을 통해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중 가장 위험한 편견일테죠.  그래서 세이버매트릭스의 본질은 통계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사실에 접근하는 태도가 아닐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야구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의 추구 the search for objective knowledge about baseball" 가 아닐까요. 


"야구통계 또는 세이버메트릭스의 가치는 콤마 단위로 선수를 평가해서 줄세우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그것의 엄격함과 정밀함은 편견과 부정확한 기억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또 야구에 대한 애정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댓글
  • 프로필사진 dd12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지식의 도구가 다시 편견을 만들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네요 2017.06.20 20:11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