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8회는 정말 있을까?
엘지트윈스, 짜릿한 승부에 대한 통계적 회고
거짓말같은 이병규의 대타홈런, 라.뱅.쓰.리.런 (사진 OSEN)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별로 믿을 게 못됩니다. 야구팬의 기억도 다를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3시간 짜리 한경기 안에서도 안드로메다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고 그러다가 지쳐 야구를 끊겠다는 다짐도 여러번 하지만 결국 저녁시간이 되면 늘 있던 그 자리로 돌아오는 이들에게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억이란 것은 애당초 요령부득입니다.
물론 이걸 나쁘다 할 이유는 없습니다. 행복했던 승리의 격정은 방부처리된 고대문명의 미라처럼 오래오래 그리고 허무한 패배의 상실은 단지 다음번 승리까지만 유효한 망각의 축복도 없이 우리가 무슨 수로 팬질을 이렇게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요? 다만 부정확한 기억력으로 인해 생길 수도 있는 특정 선수에 대한 편견만 스스로 삼가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지고 있는 경기라도 후반에 접어들며 새삼 설레게 만드는 “약속의 8회”는 어디에 속할까요? 좋은 것만, 인상 깊은 것만 남는 우리 두뇌의 각인효과 탓에 생긴 부작용인가요 아니면 트윈스 선수들의 유전자 안에 있는 특별한 어떤 능력인 것일까요?
약속의 8회는 정말 존재하는가?
지난 주말, 두산과의 잠실시리즈를 위닝으로 결판지은 이진영의 끝내기 홈런이 터진 것은 9회였지만 그 전 2경기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그 8회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시리즈 첫경기 1-2로 끌려가던 8회말 전설의 라뱅쓰리런이 작렬하며 5-2 역전승을 이루어냈고 토요일 경기도 비록 졌지만 8회 추격 3득점은 자칫 일방적인 패배로 끝날 경우 다음 경기의 분위기도 망가뜨릴 상황에서 반전의 기세를 만들었고 상대 불펜에게도 부담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전 4월8일 한화전에서는 정성훈의 8회 2점 역전 홈런으로 전날의 1점차 패배를 설욕했고 결과적으로 시리즈 스윕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4월5일 삼성전 역시 8회에 역사가 일어났는데 2-5로 뒤지다 8회 2점을 따라붙으며 9회 역전승의 발판을 놓았고 결국 시즌 첫번째 위닝시리즈가 가능했습니다.
현재 6승7패를 기록중인 엘지트윈스의 팀득점은 47점으로 KT를 제외하고 최하위입니다. 10개 팀의 경기당 평균득점이 4.7점인데 반해 트윈스는 경기당 3.3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8회만 되면 다릅니다. 전체 팀득점의 26%인 12점이 8회에 나왔습니다. 9번의 이닝에서 골고루 점수가 난다면 이닝당 득점은 팀득점의 11%가 될텐데 지금까지 13경기 8회 득점은 그보다 2.5배 정도 많습니다.
일단 이번 시즌만 놓고 보면 약속의 8회란 기억의 왜곡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13경기를 치뤘을 뿐이니 우연히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128경기 동안의 지난 시즌은 어땠을까요?
14시즌 엘지트윈스, 이닝의 재구성
지난시즌에 치른 128경기 중 4회말이 끝났을 때 1점이라도 앞서고 있던 경기가 44번, 지고 있던 경기가 60번입니다. 동점상황을 제외하고, 그 시점에 경기가 끝났다 가정하여 승률계산을 하면 0.426입니다. 5할이 안될 뿐 아니라 전체 9개 팀중 가장 나쁜 성적입니다. 최하위팀 한화도 4회 종료되었을 이기고 있던 경기의 비율이 0.426으로 약간이지만 더 높습니다. 그랬습니다. 트윈스 팬들은 5회가 시작될 때까지 한국의 야구팬 중 가장 어두운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5회가 지나고 나면 좀 나아집니다. 앞선 경기가 53번, 뒤진 경기가 56번입니다. 이기는 경기 비율은 0.491로 5할에 좀더 근접합니다. 순위로 보면 9개팀 중 6위에 해당합니다. 7위가 기아, 8위가 롯데, 9위가 한화입니다.
6회까지 지나면 좀더 좋아집니다. 순위는 여전히 6위이지만 앞선 경기 비율이 더 높아져서 0.495가 됩니다. 그러다가 7회가 끝나고 8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약간 다시 낮아집니다. 앞선 경기가 50번 뒤진 경기가 54번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동점상황으로 맞서던 경기가 무려 24번입니다. 9개 팀 중 당연히 가장 많은 숫자인데 6개팀은 14번 이하였습니다.
누군가는 통계가 무미건조하다 할지 몰라도 트윈스팬들의 야구통계는 종종 눈물과 한숨을 되새기게 합니다. 참 고단한 한 시즌이었습니다.
8회를 마치고 나면 드디어 앞서는 경기의 비율이 경기가 게임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5할을 넘어섭니다. 앞선경기가 56경기 뒤진경기가 55경기. 그러나 여전히 17경기는 동점으로 9회를 맞습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은 반복한다"
재미있는 것은 8회 시작시점에 앞서는 경기 비율이 전이닝의 0.495에서 0.486으로 약간 떨어지는데 순위는 도리어 6위에서 4위로 올라선다는 것입니다. 위에 있던 4위 두산이 6위로 5위 SK가 7위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5회초부터 8회말까지 리드한 경기와 뒤지던 경기의 비율곡선은 어쩌면 팬들의 정서상태 그래프 같기도 합니다. 바닥에서 출발해서 6회 7회 오르락 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8회말이 끝나며 최고조에 이르는 패턴이 오후6시반부터 3시간여 동안의 우리 심장 온도와 참 비슷합니다.
또 초반 이닝부터 8회 9회에 이르는 흐름이 지난해 한시즌 동안의 부침과 묘하게 일치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밑바닥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한동안 6위 근처에서 4강을 노려보다가 경쟁팀들의 “니가가라 4강” 시전으로 가을야구 컷오프안에 들었던 과정과 오버랩됩니다. 생물학자 헤켈이 말했습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작년이 꼭 그렇습니다.
8회를 기점으로 지고 있던 경기보다 앞서는 경기가 많아진 터닝포인트가 약속의 8회에 관한 통계적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8회” 만큼 14시즌 엘지트윈스의 팀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키워드도 없는거 같습니다.
지난해 트윈스의 공격력은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바닥이었습니다. 하지만 8회만 놓고보면 좀 달라집니다. 14시즌 8회 득점은 96점이었는데 놀랍게도 9개팀 중 1위입니다. 2위는 84점으로 삼성과 넥센입니다. 적어도 8회에는 리그에서 높은 득점력을 가졌던 두 팀을 12점이나 앞섭니다.
아래 그림은 4회 종료시점부터 8회 종료시점까지 앞선 경기와 뒤진 경기의 비율입니다. 그런데 왠지 3월부터 10월까지 시즌 순위변동표와 비슷해보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8회에 관한 통계적 해부
끝내기 이닝종료가 있는 9회와 연장이닝을 제외하고 8회까지 중에서 득점이 가장 많은 것은 1회입니다. 평균보다 13% 정도 많습니다. 선발투수가 아직 영점을 잡지 못해서 일수도 있지만 통계적으로는 1번부터 시작되는 타순이 가장 득점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것 같습니다. 다른 이닝도 1번타자가 선두타자로 나오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득점이 더 많습니다.
7회가 두번째로 득점이 많기는 하지만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1회가 전체평균보다 13% 많은 반면 7회는 2.3% 많습니다. 그리고 8회는 가장 득점이 적은 이닝입니다. 대체로 하위타선부터 공격이 시작되기 때문에 득점이 낮은 2회와 같은데, 평균보다 5% 점수가 적게 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다른 팀은 공격력에 비해 8회에 더 적은 득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차이가 적은 팀은 2-3% 정도이고 SK는 19%, 두산 17% 정도 득점력이 떨어집니다.
반면 엘지트윈스는 8회 득점이 팀의 이닝평균보다 27% 높습니다. 9개팀*8이닝=72개 이닝 중 3번째로 높고 원래 고득점 환경인 1회를 제외하면 2번째로 높습니다. 다른 팀은 가장 점수를 못내는 이닝이 8회인데 유독 트윈스는 거꾸로 갔습니다. 트윈스의 모든 이닝 중 8회의 득점이 가장 많습니다.
약속의 8회가 성립되기 위해 필요한 또다른 요인은 실점억제입니다. 8회에 상대적으로 많은 득점을 만들어도 이미 점수차가 벌어져 있다면 역전도 없고 약속의 이닝으로 느낄 이유도 없습니다. 실점억제라는 면에서 “약속의 8회”는 그보다 앞서 준비됩니다. 6회의 이닝당 실점억제는 9개팀 중 1위, 7회는 2위, 8회는 3위입니다.
이 부분 역시 다른 팀과 거꾸로 가는데 2회-5회에 비해 6회 7회의 실점은 약간 증가하는게 보통입니다. 반면 트윈스는 2-5회에 비해 6회 7회 실점이 감소합니다. 6회부터 8회까지 3이닝 동안의 실점은 경기당 1.52점으로 리그1위입니다. 아슬아슬 가슴을 졸여가지만 드디어 트윈스팬들의 시간이 이렇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야구는 6회부터 시작된다
다음은 1회부터 8회까지 엘지트윈스의 이닝당 득점-실점 마진과 누적 득실마진을 그래프로 표시한 것입니다.
푸른선은 해당 이닝의 득점, 붉은선은 허용실점이고 노란색 바는 해당 이닝의 득점-실점 마진입니다. 녹색 바는 1회부터 누적된 이닝당 득실마진입니다.
2회까지는 득점보다 실점이 많습니다. 붉은선이 푸른선 위에 있고, 노란색바가 0보다 아래로 내려가 있는 것이 그것을 표시합니다. 3회부터 이닝당 득점이 실점보다 많아지면서 노란색 바가 zero-level 위로 고개를 내밀지만 앞 이닝에서 까먹은게 있기 때문에 누적 득실마진 초록색 바는 여전히 zero-level 아래쪽에 남아 있습니다.
3회 이후부터는 이닝당 득점이 계속 실점보다 많습니다. 빼앗겼던 리드를 조금씩 되찾아오기 시작하는데, 시즌 평균 이닝당 득실점을 기준으로 할 때 누적실점보다 누적득점이 많아지는 시점은 6회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8회가 되면 푸른색 득점선은 씩씩하게 우뚝 솟아오르고 누적득실마진을 나타내는 초록색 바도 그렇습니다.
다만 9회 이후의 득실마진은 마이너스입니다. 그것이 8회말까지 이기는 경기가 지는 경기보다 한경기 많았는데 결국 시즌 전체의 성적에서 패배가 승리보다 2경기 많았던 이유입니다.
KBO 9개팀 이닝당 득점실점 통계 - http://baseball-in-play.com/167
약속의 8회는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8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지고 있던 게임이 4경기 많지만 8회가 끝나면 이기는 게임이 1경기 더 많아졌습니다. 다른 팀과 비교해도 8회에 가장 많은 승패를 뒤집은 팀입니다.
약속의 이닝은 오래 전부터 준비되었다
그러나 약속의 8회가 한순간에 다가온 것은 아닙니다.
14시즌의 트윈스가 경기 초반 좋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2회의 실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2회는 8회와 함께 가장 점수가 적게 나는 이닝입니다. 타순이 보통 하위타선으로 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트윈스는 유독 2회 실점이 많았습니다. 대신 3회부터는 (아마도) 선발투수가 좀더 안정되면서 특유의 실점억제능력이 살아나기 시작하며 이닝 득실마진을 벌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계기는 중반에 있습니다. 선발투수의 힘이 떨어지는 6회가 되면 실점이 늘어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트윈스의 6회는 리그에서 가장 적게 실점하는 이닝입니다. 한박자 정도 이른 불펜투입이 아마 그런 결과를 만들었을 거라 추측합니다. 대신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 많은 중간투수를 필요로 하긴 하겠죠. 추격과 역전을 위한 기반이 이때 준비됩니다.
7회는 클라이맥스 직전의 위기입니다. 팬들의 멘탈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강한 불펜을 가졌기 때문에 아마 그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트윈스는 7회에 역전을 많이 허용한 팀입니다. 6회말까지 앞서던 경기에서 역전을 허용한 비율이 20.4%로 9개팀 중 가장 높습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요인은 2가지 입니다.
역전승과 역전패에 대한 통계 - http://baseball-in-play.com/167
우선 이르게 투입된 불펜의 부작용입니다. 한두명의 에이스급 릴리프만으로 강한 불펜이 만들어질 수는 없습니다. 특히 선발이 길게 던져주지 못하고 5회나 6회부터 릴리프가 투입될 경우 결국 어딘가에 빈틈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지난 시즌은 그게 7회였던거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타자들의 문제입니다. 7회가 시작될 때 앞서다가 역전패당한 경기에서 팀이 가지고 있던 리드는 평균 1.5점 밖에 되지 않습니다. 7회에 마운드에 선 투수가 1점만 잃어도 2경기 중 한경기는 동점이나 역전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팀의 경우 7회 이후 역전패한 경기의 평균 리드점수는 2.1점입니다. 불펜이 아무리 강해도 1점차 승부를 항상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후반의 역전패는 실점한 투수와 수비의 탓으로 보이기 쉽지만 그 정도의 리드폭 밖에 벌어두지 못한 타자의 책임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역전패가 가끔은 투수들의 탓이 아닌 이유
살얼음판을 지나 드디어 쇼타임!!! 내내 침묵하던 타자들이 8회에 갑자기 폭발합니다. 적어도 이 순간은 타자들의 시간이었습니다. 8회만을 보면 지켜서 이긴 이닝이 아니라 두들겨서 이긴 이닝이었습니다. 14시즌의 엘지트윈스는 득점 7위, 실점 3위팀이었지만 8회 한이닝으로 한정하면 공격 1위, 투수/수비 3위팀이었습니다.
도대체 왜그러는 걸까요? 선발보다 불펜에 단단함이 더해진 투수력은 팀컬러라고 치더라도 타자들의 남다른 기벽은 그들이 어렸을 때 읽었던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어떤 만화 탓일까요? 서태웅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트윈스의 14시즌은 8회 이전까지 속이 터지고, 8회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목이 터지던 한해였습니다. 8회에 부르게 되어 있는 불후의 명국 승리의 노래를 더 짜릿하게 만들려는 배려인가요? 혹여 트윈스팬의 조울증세가 야구팬 중에서도 유독 심하다면 그건 팬들의 탓이 아닙니다. 못믿을 기억력이 부른 왜곡도 아닙니다. 실제로 작년 트윈스의 야구가 그랬습니다.
약속의 8회는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순간이 아니라 이런저런 요인들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전력구성의 특징 그리고 설명되기 어려운 8회의 남다른 기운이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올해는 어떨까요? 끝까지 버티며 기어이 이겨내는 선수들의 모습이 대견하고 별스럽게 농축된 승리의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즐겁지만 지난 13경기만 보면, 계속 이런 식으로 길고 긴 한시즌 동안 우리 멘탈이 남아날까 걱정은 됩니다. 그래도 어쩌나요. 우리는 트윈스팬인데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더 격렬하게 기다려볼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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