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투수란 현대야구의 우상인가?
라루사이즘의 성립과 그에 대한 세이버메트릭스의 실패한 도전
마무리투수는 꼭 마지막 1이닝을 던져야 할까?
2015년 한국에서 야구를 보는 팬들도 경기의 마지막 순간을 팀의 마무리 투수가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야구의 많은 것이 그렇듯이 구원투수들의 운영 시스템 역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결과입니다.
한 이닝을 책임지는 전문 마무리투수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1988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감독이었던 토니 라루사(Anthony La Russa, Jr.)였습니다. 그는 2011년 은퇴하기까지 2728승을 올려 역대 MLB 감독 최다승 3위에 올라있고 당연히 그리고 만장일치로 명예의 전당에 들었습니다.
이전까지 마무리 투수는 지금 말로 하면 중무리였습니다. 선발투수와 구원투수의 역할분담은 어느정도 이루어져 있었지만 지금처럼 마지막 이닝을 전담하는 전문 마무리 개념은 없었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그게 6회든 아니면 7회나 8회든 등판했고 큰 문제가 없으면 그대로 2-3이닝 혹은 4이닝이나 5이닝도 혼자 던졌고 그러다 힘이 떨어지면 또다른 투수가 올라와서 경기를 마무리하는 식이었습니다.
토니 라루사의 혁신적인 불펜운용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최초의 전문마무리 투수라 해야 할 데니스 애커슬리Dennis Lee Eckersley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1975년부터 1986년까지 매년 평균 208이닝을 던지며 151승 128패 ERA 3.67의 수준급 선발투수였는데, 86년 나이 때문인지 하향세를 타게되었고 87년에는 중간투수로 괜찮은 투구를 보이자 라루사의 획기적인 실험의 첫번째 주인공으로 낙점됩니다.
1이닝 전문마무리라는 (당시로서는) 아주 별난 역할을 맡은 애커슬리는 60경기 72.1이닝을 던지며 ERA 2.35 45세이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고 90년에는 48세이브 ERA 0.61, 91년에는 51세이브를 기록하며 37세의 나이로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및 MVP를 동시 수상합니다. 불펜투수로서는 이례적으로 명예의 전당 입성에 성공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 때문에 1이닝 전문마무리 시스템은 라루사이즘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토니 라루사는 좌우놀이의 원조인 플래툰시스템을 창안하고 사용한 감독이기도 합니다.
라루사이즘의 탄생과 그에 대한 도전
오클랜드의 1이닝 전문마무리 실험은 애커슬리라는 명백한 성공의 증거 때문인지 순식간에 다른 팀에게도 퍼져나가 이제는 미국이든 일본이든 한국이든 지극히 당연하며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불펜 운영시스템으로 정착되었고 그를 벗어나는 것은 야구 모르는 아주 무식하게 야만적인 짓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해보이는 1이닝 전문 마무리 개념이 허상이며 비효율적이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이 세이버메트리션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대략 2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세이브는 야구에서 대표적으로 과대평가되고 있는 기록이다. 둘째 가장 구위가 좋은 불펜에이스는 9회가 아니라 그게 7회든 8회든 결정적인 위기상황에서 먼저 등판시키는 쪽이 더 많은 승리에 도움이 된다.
달리 표현한다면 30세이브나 40세이브를 기록하며 상징적인 팀의 (소위) “수호신”으로 칭송받는 투수들의 실질적인 승리기여도는 사실 별게 아니다 라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그 근거로 (팬들이 고통스럽게 체감하는 것과는 다르게) 세이브 조건에 해당하는 9회 3점차 이내 상황에서 경기가 뒤집히는 비율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듭니다.
2000년대 MLB의 통계를 기준으로 할 때 평균적인 세이브 성공율을 95% 정도입니다. 좀더 세분화해서 3점차 리드일 때 97.6% 2점차 리드일 때 93.1% 1점차 리드일때 84.8% 입니다. 그렇다면 세이브성공이란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처럼 불펜 에이스들이 1이닝을 전담하는 마무리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높은 세이브성공율이 가능했다고 말이죠. 또는 일반적인 모든 세이브 조건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지만 1점차 같은 터프 세이브 조건에서는 불펜 에이스의 역할이 비로서 필요해지는 법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루사이즘 이전 1988년 이전의 통계와 이후 모든 팀이 1이닝 전문마무리 시스템을 채택하게 된 90년대 후반 또는 2000년대 이후의 통계를 비교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클로저의 기여도는 사실 별로 높지 않다?
다음은 1960년대 즉 1이닝 마무리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부터 세이브 조건에 해당되는 3점차, 2점차, 1점차 상황의 승리비율 통계입니다.
win% | 3run lead | 2run lead | 1run lead |
1960s | 0.974 | 0.930 | 0.844 |
1970s | 0.977 | 0.925 | 0.850 |
1980s | 0.975 | 0.941 | 0.852 |
1990s | 0.963 | 0.936 | 0.846 |
2000s | 0.976 | 0.931 | 0.848 |
보는 것처럼 큰 차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불펜에서 가장 잘던지는 투수를 애지중지 아껴두었다가 세이버 조건에 해당하는 마지막 이닝에 투입을 하던 시절이나 그렇지 않고 대충 중무리들이 돌아가며 마지막 이닝을 지키던 시절이나 팀의 승리를 지켜낼 확율은 적어도 통계적으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세이버메트리션들은 불펜에이스를 9회가 아닌 7회나 8회에라도 위기상황이 오면 당겨서 써먹는 쪽이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7회나 8회의 위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경기가 뒤집히게 될 경우 아껴둔 불펜에이스를 투입한 기회 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교조 빌제임스는 이 주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인물인데, 그의 분석에 의하면 불펜에이스를 7회 8회의 동점상황에서 투입할 경우 승률이 0.574로 올라가는 것에 비해 그렇지 않을 경우 0.500에 머문다고 합니다. 1점차, 2점차, 3점차 상황에도 마찬가지인데, 불펜에이스를 7회나 8회에 먼저 투입하는 쪽이 9회까지 기다려서 투입하는 (또는 투입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에 비해 모두 승리확율이 높아진다는 것이 빌제임스의 수많은 데이터를 기초로 시뮬레이션한 결과였습니다.
포스트-라루사이즘 : 보스턴레드삭스의 집단마무리 실험
보스턴 레드삭스는 2003년 실제로 이같은 이론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2002년 테오 엡스타인이 단장으로 부임하며 팀 체질개선을 시도하던 보스턴은 변방의 세이버메트릭스가 MLB의 주류로 자리잡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구단입니다.
구단은 애당초 오클랜드의 신화를 만들어낸 빌리빈을 데리고 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머니볼의 마지막 장면이 그리고 있듯이, 빌리빈은 그 제안을 거절했고 보스턴은 예일대 출신 엘리트이자 동시에 서른도 안된 게다가 선수 경력을 물론이고 프론트 경력도 거의 없는 테오 옙스타인을 단장 자리에 앉힙니다. 그에 더해서 빌 제임스가 구단의 자문역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지긋지슷한 밤비노의 저주를 풀고 지역라이벌인 양키즈에 대한 해묵은 패배감을 극복할 수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구단 보스턴, MLB에서 유래없이 젊고 급진적인 단장 테오 옙스타인, 세이버메트릭스의 역사 그 자체였던 거두 빌제임스의 합류 이것이 합쳐져서 선택한 것이 1이닝 마무리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소위 “집단마무리체제 closer by committe” 였습니다. 그렇게 2003년의 보스턴 레드삭스는 시즌을 맞습니다. 결과는?
음… 개막전부터 최약체였던 템파베이를 상대로 어이없는 막판 역전패를 당한 후 불펜투수들은 매일 매일 불쇼를 펼쳤습니다. 구단은 어쩔 수 없이 토론토 출신의 23살짜리 유망주급 정도에 불과하던 브랜던 라이언에게 임시 마무리를 맡겼고 시즌 중에 부랴부랴 마무리투수를 사오느라 호들갑을 떨어야 했습니다. 그때 영입한 것이 2002년 애리조나 우승 마무리였던 김병현입니다.
이유와 과정은 달랐지만 그 삽질의 혼돈스러움으로만 보면, 시즌 초 마무리 후보들의 연이은 불쇼, 고육지책이었던 1년차 루키 임찬규의 마무리 기용, 그러다가 예의 그 617참사 이후 박병호와 송신영이 낀 (결과적으로) 역대급 뻘트레이드를 결행해야 했던 어느 팀과 비슷했다랄까요? 어쨌든 그 이후 MLB의 어느팀도 1이닝 전문마무리라는 라루사이즘의 신성한 정당성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이버메트리션들이 모두가 의심치 않았던 기존의 관점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늘 그렇게 발전해왔으니까요. 오히려 별스러운 일은 그들이 라루사이즘을 부정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치명적 실패
지난 20여년 동안의 MLB 프론트의 구단운영전략과 벤치의 경기운영전략의 변화는, 한줌에 불과했던 게다가 선수경력도 없고 프론트 경력도 없는 야구오타쿠들이 하나씩 하나씩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 할 MLB의 성역을 부수고 들어가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해왔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고 그들이 찾아내고 주장했던 것들은 대부분 구단의 운영원칙으로 자리잡아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명백해보였던 “마무리투수의 우상”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빌제임스와 테오옙스타인라는 당대의 혁명가 콤비가 프론트와 현장의 권력을 쥐고 있던 2003년의 보스턴에서조차.
물론 보스턴의 실패가 포스트-라루사이즘의 실패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그해의 보스턴 불펜투수들의 면면을 보면 실패가 단지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이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또다시 가슴아프게 비교하자면 KBO 어느 팀 역사 속에 있던 “방화신기” 불펜을 데리고 새로운 시스템을 시도한 후 그것이 실패했다고 시스템의 파산선고를 내리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는 실패였고 (그것도 처절하고 아주 망신스럽게) 라루사이즘은 여전히 불펜의 운영시스템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작은 도전이나 의심조차 허락하지 않는 강고함으로.
마무리투수라는 자리에는 통계와 같은 객관적 지표로 설명하거나 해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요? 자신들이 발견한 거의 모든 것을 실제 현실에서도 증명해낸 세이버메트릭스는 왜 마무리투수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강한 셋업 없이 위대한 마무리를 존재할 수 없다
여전히 생각해 볼만한 시사점은 남아있습니다. 경기 후반의 마운드를 지배하는 것은 어쩌면 한명의 탁월한 마무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들어 14시즌 넥센의 손승락은 뛰어난 마무리투수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손승락 등판상황의 레버리지 인덱스 즉 승패결정 중요도 지수는 9개팀의 마무리 투수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합니다. 즉 비교적 편한 상황에서 등판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많은 세이브를 기록한 것은 7회와 8회 거칠지만 우격다짐의 구위로 상대의 추격 또는 역전 기회를 미리 봉쇄해두었던 조상우나 한현희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14시즌 9개팀 모든 불펜투수 중 WPA기준 승리기여도가 가장 높았던 것은 한현희였습니다. 송승락은 팀내에서도 조상우에 이어 3번째입니다.
참고 - 구원투수들이 위험수당을 받는다면 http://baseball-in-play.com/160
천하의 오승환이 있었다해도 안지만, 권혁 등의 셋업이 없었다면 지난 몇년 동안의 삼성불펜은 성립하기 어려웠고 마찬가지로 이동현과 신재웅이 없이 리그 최강의 트윈스불펜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7회와 8회에 무너진다면 마지막 이닝의 세이브, 팀의 승리도 없으니까요.
기회를 빌어 적는 의견 - 봉중근의 마무리 기용은 현명한가?
저는 양상문감독의 현재 마무리 기용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이란 선택가능한 옵션 중에서, [성공확율] 곱하기 [기대이익] 나누기 [위험부담] 이 가장 큰 것을 말합니다.
트윈스의 마무리 시나리오는 둘 중 하나입니다.
1) 좀더 봉중근 마무리를 밀고 나간다.
2) 이동현이나 정찬헌을 마무리로 올리고 봉중근은 셋업으로 내려가거나 2군에서 구위점검 후 다시한번 마무리투입에 테스트한다.
첫번째 옵션이 성공했을 때의 기대이익은 지난 2년동안의 불펜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며 7회와 8회를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는 셋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실패했을 때의 위험은 앞으로의 몇 경기 쯤을 마무리 실패로 내주고 결국 봉중근이 다른 임무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옵션의기대이익은 9회의 세이브상황에서 승패가 좀더 안전해진다는 것 위험은 78회에 잘던지던 투수들이 과연 9회에도 그럴 수 있을것이냐라는 문제와 7회와 8회를 맡길 수 있는 투수가 한명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지금 트윈스 불펜상황에서라면 김선규, 최동환, 윤지웅 중 하나가 프라이머리 셋업글의 활약을 해주지 못하면 9회를 지키기 위해 7회와 8회가 헐거워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또 봉중근과 이동현의 보직교환 같은 것이 선수단의 심리적 혼란의 위험도 있겠죠. 마무리투수에게 구위만큼 중요한 것은 팀내의 공감대일테니까요. 어쨌든 그들은 정해진 능력치가 정해진 함수에 따라 발현되는 게임캐릭터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혹여 개인적 자존심이나 감정이 무슨 상관이냐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하실 분이 있다면 미리 이렇게 대답해두겠습니다. 예,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수 하나하나의 상황과 조건에 눈감고 그들이 설계도에 따른 부품처럼 일정하게 작동해주길 바라는 팀은 절대로 위대한 팀이 될 수 없다 라고요. 우리가 원하는 팀은, 선수 보다 위대하길 바라는 팀이 아니라 다른 팀보다 강해지려 애쓰는 팀이라고요.
위의 두가지 옵션을 비교했을 때 저는 두번째 옵션 즉 봉중근 보직교체가 현재의 아슬아슬한 실험보다 성공확율이 더 낫다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성공했다 해도 7회와 8회가 약해지는 것이 팀의 후반승부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셋업이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려면 신재웅-이동현 라인 아래의 선수들이 한단계씩 올라와주거나 또는 봉중근이 이동현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인데 전자라면 그것 역시 불확실성이 큰 도박이고 후자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도박인게 아닌가요?
해서 설사 지금과 같은 봉중근 마무리 기용이 몇경기 후 최종적인 실패로 귀결된다 해도 그 과정에서 잃는 것보다는 마무리 교체라는 새로운 시도의 결과로 잃을 수 있는게 더 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이유로 지켜보는 벤치나 팬들 더구나 그 순간 마운드에 서는, 암흑기의 고독한 에이스였고 암흑리를 끊은 마무리투수였던 그에게 가혹한 일이 될지라도 지금의 기용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은 그 선택이 완전무결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또 다른 선택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낫기 때문이니까요.
그저 지난 십수년을 그래왔듯이 기대하고 바라고 기다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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